안 규 식
고대로부터 인간의 육체는 그 무한한 표현가능성 때문에 많은 미술가들의 탐구 대상이 되어왔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각 시대마다 반영된 인체의 특성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그 사회의 가치체계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체는 어느 특정한 시대를 해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써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 하에 추종완의 작업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위기감, 곧 개인의 존재론적 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추종완은 학부시절부터 자신의 작업에서 인체에 대한 일종의 집착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그 표정을 통해 감정이입을 추구하는 전통적 의미의 인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체는 지나친 왜곡과 기괴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혐오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인상은 형상의 파괴적인 형태와 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흑백의 간결한 색 대조에서 비롯된다. 그의 인체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공포와 폭력의 흔적들은 인간의 끔직한 잔학성에 전율을 느끼게 하거나 극심한 내적 고통의 아픔을 환기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뭉크의 판화나 베이컨의 고깃덩이로 표현된 인체에서 보듯이 현대미술에 올수록 그러한 표현들이 증가된다는 사실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는 문명의 진보과정이 수반한 성장 통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선 그의 인체는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웅크려 앉은 채 무언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손과 발의 표정은 웅변적이기까지 하지만 그 대화는 불완전한 인체의 형상 때문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마치 포탄에 폭격당한 듯 한 상반신과 생략된 얼굴이 전체의 형상을 기괴하게 만들어서 몸 전체의 메시지보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편 분해된 상반신의 조각들은 종이 혹은 천 조각처럼 공중을 부유하고 있어서 직접적인 기괴함은 덜 느껴진다. 또한 상․하반신의 격리로 인체의 형상은 하나로써 인지할 수 없기에 그러한 잔인함은 더 감쇄되며, 전체적인 풍경속의 형상들이 현실을 초월해 있는 비현실적 대상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는 수단으로서의 입과, 말의 내용을 만드는 뇌, 심장을 이미 상실한 인체,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실존은 부재하고, 사회적 시스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만 남은 비주체적 모습으로서의 현대인, 작가는 이 두 대상을 오버랩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찰리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표현했듯이, 기계부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키려고 자신이 만든 껍질 속으로 숨어드는 나약함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상반신과 하반신의 묘한 대조이다. 폭격당한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상반신은 우리의 혹은 작가 자신의 인격에 덥힌 가식적인 외피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이 상황을 벗어나고픈 작가 자신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반면 구체적으로 묘사된 팔과 다리는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수동적 객체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며 여기엔 잔해의 흔적이 없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몸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각성의 매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양자 간의 이 현격한 이격(離隔)은 원만한 타협에 실패한 그리하여 결국 격심한 정체감의 혼란이나 정신적 고통에 빠진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감을 잘 예시하고 있다. 그래서 기괴함으로 가득 찬 전체 풍경에는 잔인함이나 공포의 인상보다는 요동치는 내면의 갈등, 혹은 자기비판에 대한 신랄함이 배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