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Legacy : 위대한 유산
-Plastic bag을 이용한 조형성 연구
먼저 비닐봉지의 용어부터 정리하자면 영어로 plastic bag라고 한다. 우선 비닐, Vinyl(발음은 ‘바이널’이다)은 비닐 수지(polyvinyl)를 가리키는 화학용어로서 비닐은 영미권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바로 영어 plastic이 비닐 수지를 비롯하여 합성수지로 만든 것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우리는 비닐봉지라는 단어에 익숙하지만, 정확한 용어는 Plastic bag이다.
현대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어 플라스틱시대로 불릴 만큼 플라스틱과 비닐은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1977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비닐봉지를 만들었는데, 샌드위치 봉투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위생적이고, 종이봉투와 같이 나무를 쓰지 않아 친환경 제품으로 생각되었다. 가벼운 상품을 간단하게 포장해서 운반하는데 용이하고 다른 용기와 달리 무게가 가볍고 가격도 싸며, 종이나 천으로 만든 봉투와 달리 물기가 있어도 젖거나 새지 않고, 입구를 막으면 냄새도 나지 않아 널리 쓰인다.
이렇게 생겨난 비닐봉지는 사용에는 편리하지만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는 최소 20년에서 수 백 년이 걸려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꼽힌다. ‘플라스틱 폐기물’은 우리 주변을 아니,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다. ‘플라스틱’은 가장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였지만, 인간의 이기(利己)로 탄생된 ‘플라스틱’은 도리어 인간을 역습한다. 그것은 초미세먼지로 모든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고 썩지도 않은 채 야채와 과일 그리고 어류에 침투, 함유되어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비닐봉지라는 오브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학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나는 기계화된 문명, 과학주의 세계관에 대한 불확실한 전망과 불안, 그 편의에 의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 전쟁과 테러 등 산업문명이 배출해 낸 각종 위험과 자연의 재앙에 노출된 인간에게서 휴머니즘의 갈망과 인간의 실존적 자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다. 인간의 순수와 진실 뒤편에 달라붙어 있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현대사회 속에 살고 있는 화려한 현대인, 그 내면 속에 들끓고 있는 선과 악의 양면성, 인간 내면의 이율배반적 충동이나 갈등에 의해서 병들어 가는 인간 내면의 상처는 외면하고 부인하고 싶은 현대인의 일그러진 내면의 자화상이다. 몸을 통해 정신을 대변한다는 가정 하에 몸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현대인의 존재적 상황을 표현해 왔다. 여기에 사용된 인체는 내면세계의 외화를 위한 신체이며, 인간의 황폐하고 허무한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왜곡되고 변형된 인체가 표현적인 형상으로 드러났을 때 그 이미지 자체가 껍데기인데, 나의 작업에 있어서 껍데기란 작업 전반에 깔려있는 표현적인 모티브이며, 껍데기의 형상을 통해 주제를 대변한다. 인간의 정신을 담고 있던 그릇인 피부가 열려지고, 그 내부의 내용물이 증발해 버린 후 남겨진 껍질만이 마치 허약한 존재의 증표인 듯 남겨지기를 시도했다. 껍데기의 형상은 비닐봉지의 구김을 차용하여 표현되는데 비닐봉지는 구김의 차용뿐만 아니라 상징성을 띤 오브제로 인체의 형상과 결합하여 설치작업으로 표현하였다.
비닐봉지는 인간이 이용, 소비되는 전유물인 동시에 비닐봉지의 속성인 포장하는 껍데기라는 이미지, 그리고 썩지 않고 쉽게 쓰고 버려지는 일회성을 띤 소모품이다. 이 당시 자연을 상징하는 어린아이, 개(동물들)와 대립되는 대상물로 비닐봉지를 제시하였다. 자연과 상반되는, 자연에 동화되지 않는 과학문명의 단편들인 동시에 물화되고, 부품화된 현대인의 위기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가 비닐봉지인 것이다. (Homepage: www.choojongwan.com 참조)
이번 전시는 비닐봉지를 이용한 조형성에 대한 연구이다. 이번 전시에 있어서 예전 작업들과 비교되는 가장 큰 특징은 주를 이루던 인체의 형상이 배제된 것이다. 오직 비닐의 재료적 속성과 비닐봉지의 오브제적 상징성만으로 전시장에 펼쳐 놓는다.
작업의 출발은 어떻게 하면 비닐이라는 재질을 내가 원하는 대로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비닐봉지를 이용한 예전 작업에서는 재질의 특성상 재료적인 표현의 한계와 보존의 한계로 인해 설치작업으로만 제시되었다. 썩지 않는 재료가 보존에 한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데 비닐을 굳히고 영구히 고정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종류의 미디엄을 실험하였다. 새롭게 접하는 레진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와 실험은 비닐봉지가 갖는 기본 형태부터 시작하여 비닐봉지의 변형된 이미지 표현, 드로잉적 성격을 띤 표현방법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오브제를 이용한 평면작업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콜라주의 느낌을 최소화 하고자 하였다. 비닐봉지라는 오브제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감쇄시키고 보편적인 페인팅 재료로서의 표현방식으로 보여지길 유도하였다. 이것은 관객이 처음 작업을 대할 때 기존에 보아왔던 예술작품처럼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인간들이 쉽게 쓰고 배설한 한낮 비닐봉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도한 접근이다.
이번 전시는 변화와 시도가 확연히 느껴지는 전시인 만큼 비닐봉지가 등장하게 된 이해를 돕고자 비닐봉지의 객관적인 설명과 더불어 학부시절에 비닐봉지를 다루게 된 계기부터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개인적으로도 예전 작업들을 돌이켜 보며 지금의 작업을 새롭게 재정립하고, 다양한 재료적 실험과 조형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이번 연구년 기간이 유익한 시간이었다. 늘 그러하듯이 이번 전시 또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자리이다. 앞으로의 또 다른 시도와 변신이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2021. 12
추 종 완